학교에서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사진 속 그 회색 벽돌 성벽은 명나라가 만든 것입니다.
방어만 하려고 쌓은 것이 아닙니다. 무역을 막고 세금을 걷는 일이 함께 걸렸습니다.
검색해 보고 진시황과 명나라가 왜 나란히 나오는지 헷갈렸다면, 그 헷갈림을 푸는 글입니다.
| 구분 | 핵심 내용 |
|---|---|
| 이름 뜻 | 만 리, 약 5,000km |
| 실측 길이 | 21,196km |
| 진시황 장성 | 기원전 221년, 흙과 돌 |
| 명나라 장성 | 1521~1566년 벽돌 |
| 동원 규모 | 군사·민간 30만 이상 |
| 결정적 사건 | 1550년 경술의 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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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터 실제와 다릅니다
만 리는 약 5,000km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실측한 총길이는 21,196km로, 이름이 말한 길이의 네 배가 넘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처음 나오는 이름입니다. 자로 잰 숫자가 아니라 ‘아주 길다’는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성벽을 그냥 ‘장성(長城)’이라 부릅니다. 앞의 ‘만리’는 잘 붙이지 않는 표현.
진시황이 쌓은 게 아닌가요?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뒤 각국이 이미 쌓아 둔 장성들을 이어 붙였습니다. 선을 새로 긋는 대신 이미 있던 성벽을 잇고 보강했습니다. 여기에 군사와 민간인 30만 이상이 동원됐습니다.
재료는 흙과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관광지의 벽돌 구간은 명나라(1368~1644년) 것입니다. 가정제 재위기(1521~1566년)에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심해지자 벽돌로 본격 축조했습니다.
쌓은 기술도 시기도 다른데 이름은 하나로 굳었습니다. 노선이 같아서가 아니라, 북쪽을 가로막는 기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역을 막자 북경이 포위됐습니다
1550년, 몽골의 알탄 칸이 명나라를 쳐서 북경을 포위했습니다. 계기는 영토가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가정제가 몽골과의 무역을 거절한 것이 경술의 변(庚戌之變)을 불렀습니다.
유목민에게는 곡식과 천이 필요했고, 장성의 관문을 거쳐야 그것을 얻었습니다. 문을 닫으면 협상 카드가 되고, 열면 관세를 걷습니다.
담이면서 계산대였습니다. 어디로 들어올지 정해 두면 사람과 물자를 한자리에서 셉니다.
안쪽으로 한 겹이 더 있었습니다. 안쪽은 농사짓는 땅, 바깥은 말 타는 땅이라고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쌓았는데 왜 뚫렸을까요?

벽은 길수록 얇아집니다. 21,196km에 병력을 고르게 세우지 못하니, 지키는 쪽은 나눠 서고 치는 쪽은 한 곳만 고르면 됐습니다.
한반도는 반대로 갔습니다. 산맥의 길목마다 산성을 따로 두고 흩어 놓았습니다.
지형이 어느 쪽을 쓸지 정했습니다. 평지가 넓게 열린 화북이라면 선을 그어 통로를 좁히는 장성이 유리합니다. 산이 많은 한반도에서는 산성이 같은 방어를 훨씬 적은 병력으로 해냅니다.
| 흔한 오해 | 실제 |
|---|---|
| 맨눈 관측 | 불가능 |
| 순수 방어용 | 무역·세금 |
| 벽돌=진나라 | 명나라 축조 |
정리
벽돌은 명나라, 흙은 진나라로 나눠 보면 두 시대가 섞이지 않습니다. 장성은 적을 막으면서 사람과 물자에 값을 매겼습니다.
다음에 만리장성 사진을 보면 성벽 위 관문부터 찾아보세요. 그 문 앞에서 이 성을 왜 쌓았는지 짚어 보세요.
참고한 곳: 위키백과, SBS 뉴스, 중국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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