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누구인가, 탈번 사형인데 왜 무사했나

일본역사 사카모토 료마 누구, 3분 정리 대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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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게임에서 이름만 봤던 사람들이 검색해서 들어옵니다. 일본역사 사카모토 료마 누구냐고 물으면, 1836년 1월 3일(양력 환산) 도사번에서 태어난 하급 무사라는 답이 먼저 나옵니다. 1862년 3월 24일(양력 환산) 번을 버리고 낭인이 됐는데, 당시 탈번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처벌은 없었고, 4년 뒤 그가 중개한 동맹이 일본을 바꿉니다.

한눈에 보기
구분 핵심 내용
태어난 해 1836년 1월 3일
출신 도사번 하급 무사
탈번 1862년 3월 24일
삿초동맹 1866년 1월 21일
대정봉환 1867년 11월 9일
죽은 날 1867년 12월 10일, 교토 오미야 (모두 양력 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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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번은 사형인데 왜 무사했을까?

막부의 힘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법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법을 집행할 힘이 사라진 겁니다.

번을 떠난 무사는 주군을 배신한 자로 취급받았고, 잡히면 죽었어요. 탈번자를 처형하려면 도사번이 막부에 협조를 요청하고 막부가 전국에 수배를 돌려야 하는데, 그 행정이 작동을 멈춘 상태였습니다.

에도에서 만난 가쓰 가이슈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862년 료마는 막부의 해군 책임자였던 가쓰의 제자가 되는데요. 막부 고위 인사가 그를 거두면서, 잡혀야 할 죄인이 도리어 막부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 이 시기 탈번자가 전부 무사했던 건 아닙니다. 료마는 가쓰라는 방패를 얻었지만, 그런 뒷배가 없던 낭인들은 잡혀 죽었어요.

번을 떠나 낭인이 되고 나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 없이 제 발로 움직였어요. 번에 남았다면 도사번 이익을 대변해야 했을 테고, 사쓰마와 조슈 사이를 오가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료마가 실제로 한 일

료마의 4년, 일본을 바꾸다 절차 안내: 1865년 9월 나가사키에 가메야마 조합 설립, 1866년 1월 21일 삿초동맹 중개, 1866년 4월 해원대로 이름 변경, 1867년 선중팔책 제안으로 대정봉환에 영향

1865년 9월 나가사키에 가메야마 조합을 세우고, 1866년 4월 해원대로 이름을 바꿉니다. 당시 조슈번은 막부에 찍혀 무기를 살 수 없었거든요. 사쓰마 이름으로 사서 조슈에 넘겨줄 누군가가 있어야 했는데, 해원대가 그 일을 했습니다.

1866년 1월 21일,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가 만나 삿초동맹을 맺습니다. 료마가 그 회담을 중개했다고 전해집니다.

1867년에는 배 위에서 고토 쇼지로에게 선중팔책을 말했습니다.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고 의회를 두자는 내용으로, 같은 해 11월 9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선언합니다.

흔히 잘못 아는 것 셋

오해와 사실, 진실은 다르다 비교표: 신센구미가 죽인 것으로 알려짐 범인 미해결 (이마이 노부오 등이 유력), 평민 출신으로 알려짐 하급 무사 (신분제가 존재하던 시대), 삿초동맹의 주역으로 평가됨 학계에서 의견 갈림

신센구미가 죽였다는 말부터 사실이 아닙니다. 1867년 12월 10일 교토 오미야 여관에서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살해됐는데, 범인은 지금도 미해결이에요. 교토 미마와리구미 소속 이마이 노부오 등이 실행범이라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평민 출신이라는 것도 틀렸습니다. 하급이어도 무사는 무사였어요. 19세기 일본은 신분제가 살아 있었습니다. 무사 자격이 없으면 전국을 오가며 번 지도부를 만나지 못했어요.

학계에서는 료마가 삿초동맹의 주역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동맹의 실질 성립 시점도 1866년 1월 21일 체결설과 1867년 11월 출병 협정설로 나뉩니다. 선중팔책 역시 후세 창작 가능성을 두고 논쟁 중입니다.

참고한 곳: 위키백과(사카모토 료마·오미야 사건·삿초 동맹)

데이팁 dayti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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