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앞에 돌기둥 두 개가 서 있습니다. 저 기둥은 1895년 2월 김홍집 내각이 헐어 버린 영은문(迎恩門)의 주초석, 그러니까 문을 받치던 다리 부분입니다. 문 자체의 역사는 1407년까지 올라갑니다.
답부터 말하면, 저 자리는 조선이 500년 동안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입니다.
| 구분 | 핵심 내용 |
|---|---|
| 첫 건립 | 1407년 모화루 |
| 이름 변경 | 1430년 모화관 |
| 현재 형태 | 1537년 영조문 |
| 영은문 개명 | 1539년 |
| 편액 재작성 | 1606년 주지번 |
| 철거 | 1895년 2월 |
| 독립문 완공 | 1896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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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은 무엇을 하던 문이었나
중국 사신이 오면 이 문으로 맞이했습니다. 국가 행사장의 정문이었어요. 조선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겼고, 그 사대외교가 여기서 벌어졌습니다.
모화루에서 모화관으로
처음에는 문이 아니라 건물이었습니다. 태종이 1407년에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해 모화루(慕華樓)를 세웠습니다.
세종이 1430년에 이 건물을 고쳐 짓고 이름을 모화관(慕華館)으로 바꿉니다. 사신이 묵고 연회를 받던 접대 건물이었어요.
영조문에서 영은문으로
문에 이름이 붙은 건 그로부터 100년 뒤입니다. 중종이 1537년에 모화관 앞 홍살문에 기와지붕을 얹고 영조문(迎詔門) 편액을 답니다.
2년 뒤인 1539년, 중국 사신이 이름을 바꾸자고 건의합니다. 그래서 영은문(迎恩門)이 됐습니다.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중국 사신은 어떤 절차로 맞았나?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면 이 문 앞에서 왕이나 왕세자가 직접 맞이했고, 그다음 모화관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열었습니다.
연회는 여섯 종류인데, 이름이 남은 건 셋뿐입니다.
- 하마연 —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말에서 내릴 때 여는 첫 연회
- 익일연, 도착 다음날 다시 한 번 베푼 자리
- 전별연 — 사신이 떠날 때 배웅하며 여는 마지막 연회
조선은 얼마나 잘 대접하느냐로 외교를 가늠하던 때라 연회 횟수를 함부로 줄이지 못했습니다.
흔히 아는 것과 실제

⚠️ 영은문이 1537년에 처음 세워졌다는 설명을 자주 봅니다. 130년을 통째로 빠뜨린 이야기입니다.
1537년에 와서야 지금의 기와지붕 모양을 갖췄습니다.
편액도 아무렇게나 걸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문이 훼손되자 선조가 1606년에 다시 세웠고, 이때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편액 글씨를 새로 썼습니다. 그 편액이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1895년, 문이 헐린 자리

1894~1896년 김홍집·박영효 내각이 근대화 개혁, 곧 갑오개혁을 밀어붙이면서 이 자리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신분제를 없애고 내각 제도를 들여오던 그 흐름에서, 사대외교의 상징물 역시 정리 대상이었습니다.
내각 안에서도 말이 엇갈렸습니다. 박영효는 모화관까지 함께 없애자고 했지만, 김홍집은 문만 헐고 건물은 다른 용도로 쓰자는 쪽이었습니다.
빈 자리에 새 문이 섭니다. 독립문은 1896년 11월 20일에 완공됐습니다. 영은문이 사라지고 1년 9개월 만입니다.
다음에 그 앞을 지나간다면
서대문 독립공원에 가면 독립문 남쪽에 그 주초석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에 새겨진 연도를 이 글의 연표와 맞춰 보세요.
참고한 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고궁박물관,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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